Category Archives: 기독교

목적이 이끄는 삶: 15일째: Formed for God’s Family

오늘의 주제는 주안의 한가족인 듯 싶습니다.

그런데, 그게 그냥 그렇게 생각한 주안의 한가족보다 더 강렬하게 이 책은 이야기 하고 있는 것 같네요. 피를 섞은 가족보다 영적인 가족이 훨씬 더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피를 섞은 가족은 지상에서 잠깐이지만, 영적인 가족은 영원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영적인 가족이라하면, 크리스챤들과의 코이노니아를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제가 싱글일때는 학교 CCC 에서 사랑방생활을 하면서 친구들/순장님/간사님들과 뒹굴면서 지냈기때문에 그때는 그 친구들과 그 인연들이 소중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싱글을 넘어서 더블이 되고 트리플이 되면서 각자의 인생을 살기 시작하고 헤어지고 사회에 나오면서 많이 떨어지게 되면서 뜸해져서 그런지, 아니면, 어떤 이유가 되서든지, 현재의 가족보다 영적인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는 형제 자매들을 내가 과연 더 소중하게 생각할 수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입니다. 어쩌면, 과거 교회사람들이나 사람들에 대해서 좋지 않은 모습도 보았었던 영향이 있을 수 있고, 사람이 사람을 신뢰한다는 것이 얼마나 조심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것도 알게 되는 나이가 되었을 즈음에 영적인 형제/자매를 가족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하라는 오늘의 도전말씀은 지금으로는 참 받아들이기가 힘드네요.

물론, Ideal 하게는 저도 동의하는 statement입니다. 그러나 실천하기에는 아직은 제가 예수님의 수준까지 가기는 턱없이 부족함을 여전히 느끼고 삽니다.

이 문제는 좀 더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만, 이 주제가 큰 카테고리안에 있기때문에 계속 나올 주제 같네요.

목적이 이끄는 삶: 14일째: When God Seems Distant

때때로 하나님의 하시는 행동에 대해서 이해가 안될 때도 있습니다. 예상치 못한 힘든 일, 나는 그것을 받을 만하지 않음에도 받는 오해, 그리고 하나님을 잘 믿는 다고 하면서 형통하지 못하게 될때 등이 있습니다.

여기에 오늘 두 구절이 저에게 마음에 다가 옵니다.

The most common mistake Christians make in worship today is seeking an experience rather than seeking God.

But as you grow in faith, he will wean you of these dependencies.

하나님의 임재는 내가 꼭 느껴야만 하는 경험에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내가 어떻게 느끼던지 상관 없이 실제 존재 하십니다. 아마도 신앙이 어릴때는 하나님께서 감정과 때로는 비성숙한 기도의 응답등으로 알려주시기도 하는 듯 싶습니다. 저도 하나님을 처음 알게 될때 그러했습니다. 유치한 기도라도 하나님께서 그 자신을 저에게 나타내시고, 연약하고 약한 믿음이 잘 자랄 수 있도록 달래 주셨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그때보다 성숙해 지면서, 가끔 하나님의 임재가 보이지 않게 느껴지거나 어째서 이런 일이…라는 일이 그 동안 벌어졌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놓지 않고, 그 전보다 더 한단계 앞으로 나갈 수 있음을 저는 또한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영원히 갑자기 없어지시는 것이 아니고, 그 필요한 단계 단계에 하나님은 지속적으로 사랑을 쏟아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 될때, 무슨 좋은 방법이 있을까요. 아마 없을 것입니다. 아마 있다면, 고통스러운 그 마음을 하나님께 그대로 가져 오고, 솔직하게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일 것입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 13일째: Worship That Pleases God

계속해서 Worship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계속 이어지는 내용에서 제가 계속 생각하고 있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에는 일맥상통 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 주목되는 말씀은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는 로마서 12장 1절의 말씀입니다. 몸을 제사로 드리라는 말이 무슨 말일까요? Physically 몸을 태워서 제삿밥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일까요? :) 성경 전반적으로 볼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Physical 한 제사는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그 분이 원하시는 것은 언제나 마음인데 어떻게 몸을 제사로 드릴 수 있을까요?

그것은 마음이 몸과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얘기 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이 있잖아. 내가 가지 않아도 마음만은 있다는 것을 기억해줘. 정말 그럴까요? 몸이 없다면 사실 마음이 있을 수 없지요. 몸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어떤 일이나 행사나 어떤 event가 있을때, 몸이 없는데 어떻게 그 사람이 정말 참여하고 있는 것이라고 봐야 할까요. 요즘은 Conference Call 등으로 Remotely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이 있기도 합니다만, 그것 역시 몸은 그곳에 집중하여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요.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는 말씀은 그런 말씀이라고 합니다. 내가 있는 곳에 내 영혼과 마음이 있다는 것. 하나님을 섬긴다고 한다면, 내 몸이 하나님을 섬기여야 한다는 것이지요. 말로만 섬긴다고 하는 것은 위선자이고, 하나님께서 무척 싫어 하시는 것이지요. 말로는 정직해야 한다, 사랑해야 한다 하면서, 실제 행동이나 그늘진 곳에서의 행동이 다르다면, 그것은 위선이며 하나님께서 싫어하신다는 얘기 같습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 12일째: Developing Your Friendship with God

오늘은 하나님과의 우정(?)을 더 깊게 하기 위해 필요한 것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첫째는 정직함이고, 둘째는 믿음의 순종이며, 세째는 열정인 듯 싶습니다.

저도 정직함에 대해서 무척 소중하게 생각하고, 예전에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다는 것이라는 제목으로 쓴 글에 조금 언급한 적이 있는데요, 하나님 앞에서의 정직함이야 말로 관계를 깊게 하는데 뿐 아니라 그 관계를 지속적으로 이어나가는데 필요한 것 같습니다.

제가 대학생시절에 과연 하나님이 정말 존재하는 것인가, 성경이 정말 맞는 것인가, 기독교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진리가 맞는 걸까 라는 의심을 강하게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 시절에 제가 했던 행동중의 하나는 무조건 믿자가 아니라, 정말 존재하는 신이 있다면 알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 했고, 내가 알 수 없는 것이라면, 기독교는 시간 낭비일 뿐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정말 사랑하신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 그분의 전적인 사랑으로 그가 저에게 나타내셨습니다. 이 사실은 언젠가 또 자세하게 기록할 것이지만, 요지는 저 역시 솔직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갔을때, 그 분이 더 기뻐하시면서 받으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오늘 읽은 구절중에 재미있는 것 하나를 기록합니다.

God listens to the passionate words of his friends; he is bored with predictable, pious cliches.

예수님께서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시면서 하신 말씀도 기억이 납니다. 기도할 때에 중언부언 하지 말고, 주기도문과 같이 기도하라는 말씀. 그 말씀과도 통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과의 뜨거운 우정을 지속적으로 갖추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그 분과 대화가 필요함을 느끼게 됩니다. 바쁘고 정신이 없는 요즘 생활속에서 하나님과의 시간을 따로 떼어 놓기가 그렇게 힘겨운 일인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그러나, 육체의 피로나 약함보다 그 분을 만나고 교제하는 시간속에서, 새벽 날개치는 독수리의 힘을 그 분이 따로 또 주실 것을 믿겠습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 11일째: Becoming Best Friends with God

때때로 제 자신이 예언하는 은사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데 종종 놀라곤 합니다. :)

어제 worship을 잘하기 위한 방법으로 제가 생각했던 것이 친밀감이었는데, 오늘의 주제가 바로 그 friendship이네요. :) 그리고 그 친밀함을 위해서 여러가지 방법의 예들을 전달해 주고 있습니다.

가장 오늘 인상 깊었던 예는 휴대폰등으로 알람을 1시간 마다 맞추어 놓고, 시간이 될 때마다 짧게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하루중에 일에 집중하다보면,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고 지나갈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새 벌써 일주일이 지나가기도 하구요. 시간마다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을 잠깐만이라도 가져본다면 그것도 좋은 방법중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이 드네요.

어제의 실천사항인 하루 한시간 완전히 하나님과의 개인시간을 갖는 것에 오늘 첫날부터 실패했습니다. 내일은 새벽예배도 있으니, 조금 일찍 일어나서 말씀묵상과 말씀을 조금 읽고, 새벽예배에 기도로 채워야 겠다는 생각을 해보네요.

목적이 이끄는 삶: 10일째: The Heart of Worship

오늘의 주제는 Surrender. 하나님께 항복하는 것입니다.

CCC에서 발행하고 있는 사영리에 나오는 마지막 장면에서 마음의 중심을 그리스도께로 드리는 그 그림이 연상이 되네요.

하나님께 항복하는데 세가지 방해요소가 있다고 합니다. 두려움, 자존심, 그리고 불확실.

저는 거기에 하나를 더 추가하고 싶은게 있습니다. 바로 비친밀감.

하나님께 완전항복하고 마음의 중심을 그리스도께 드리는 일이 그냥 갑자기 어느날 확 마음이 땅겨서 그렇게 된다면, 결론적으로는 좋겠지만, 그게 쉽지는 않은 일인 것 같습니다. 위의 세가지 방해 요소가 있지만, 그것을 아우르는 것이 비친밀감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친하지 않기때문에 두렵고, 친하지 않기때문에 아직 자존심을 내세우고, 친하지 않기에 불안한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과 친해져야 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무도 본 사람이 없지요. 음성을 들은 몇명의 구약 시대 사람이나 예수님을 직접보고 만지고 듣고 경험한 사람들이 급 부러워 지는 군요.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과 함께 친하게 지낼 수 있을까요? 아마도 성경의 말씀인 듯 싶습니다.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듣는 것이 먼저 필요한 듯 싶습니다.

최근에는 성경을 제대로 읽어보지 못한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되네요. 작년 한빛교회에서 제자훈련을 한다고 할때는 그나마 숙제라고 읽으려고 노력은 했는데, 요즘은 다시 나태해 진 듯 싶습니다. 조금 정신차리고 조금 더 시간을 내서 성경을 읽는 시간을 하루에 다시 떼어 놓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루 한시간은 하나님만 생각하는 그런 시간을 마련할 수 있는 큰 욕심을 한번 내어 보렵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 9일째: What Makes God Smile?

하나님을 미소짓게 만드는 것이 삶의 목적이다라는 것이 오늘의 주제이고, 오늘의 주제 말씀의 대표는 노아입니다. 노아에 대해서 예전에 한번 제 블로그에 기록한 적도 있습니다.

오늘의 이 책에서는 노아의 Example을 보면서 얼마나 그가 하나님을 미소짓게 하였는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미소짓게 하는데는 믿음이 필수 인 듯 싶습니다.

6 But without faith it is impossible to please Him, for he who comes to God must believe that He is, and that He is a rewarder of those who diligently seek Him.
(Hebrews 11:6, New King James Version)

(히브리서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그렇게 하기 위해 책에서는 여러가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만, 전체적으로 하나님과의 친한 관계를 가지려면 진정으로 하나님을 기뻐하는 마음과 함께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속에서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미소짓게 하는 것이 나는 힘든데 하나님만 미소짓게 하는 건 아니고, 서로 아주 친한 사이끼리 혹은 가족끼리 혹은 부모가 아이와의 관계에서 보이듯이 상호간의 즐거움과 기쁨이 있는 것 같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을 기쁨으로 믿는 마음에서의 삶인 것 같네요.

목적이 이끄는 삶: 8일째: Planned for God’s Pleasure

8일째입니다. 오늘의 제목은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계획함(?) 정도가 될까요?

오늘 할당된 Chapter의 대부분은 Worship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 어떻게 경배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많은 부분을 할당 한 듯 싶습니다. 어떤 사람은 worship이 찬양이나 예배전에 있는 어떤 형식, 혹은 어떤 style의 음악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은 worship이라는 것은 삶 전체가 하나님께 “기쁨” 으로 드려지는 삶 자체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오늘 읽은 부분 중에서 마음에 다가 왔던 것을 몇가지 인용을 할까 합니다.

– Worship is a lifestyle.

– You probably don’t like it all, but God does!

– We worship for God’s benefit.

– Our motive is to bring glory and pleasure to our Creator.

– By doing everything as if you were doing it for Jesus

– Falling in love with Jesus

요지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으로 모든 일을 해야 한다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익 (benefit)을 위해서는 worship이 성립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위의 인용구에서 하나님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는 인용구는 “You probably don’t like it all, but God does!” 입니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사람들은 각자의 취향, 그리고 자라온 배경, 자신의 문화때문에 모든 것을 좋아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각각 그대로 좋아하신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나는 골프 치는 것을 시간낭비라고 생각하는데, 어떤 사람은 골프치는 것을 무척 즐거워 한다는 것이지요. 내가 좋아하지 않다 하더라도, 사실은 하나님은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기뻐 하실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as long as he/she worships Him.)

지금까지 읽은 이 책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나되게 만드신 나를 발견하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속에서 그 분이 나에게 어떤 것을 주시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솔직하게 말해서 이미 그 소명에 대해서 이 책을 읽기 전에 깊게 묵상했던 적이 있고, 그 소명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무언가 살아가면서 가끔 빠진 듯한, 뭔가 생각은 소명인데 행동은 그렇지 못한 그런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부디 이 책을 읽으면서, 그동안 생각했었던 그런 내가 예전에 발견한 소명을 재발견하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네요.

목적이 이끄는 삶: 7일째: The reason for everything

1일 부터 6일까지는 그냥 설렁설렁 책을 넘기면서 왔던 듯 싶습니다. 좋은 책이라고 추천을 받은지 어언 3-4년째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만, 게으름과 우정을 나눈지 어언 30 몇년을 지나온 세월을 무시할 수 없는 듯 싶습니다.

6일까지는 그냥 날짜를 지키지 않고 읽었는데, 7일째를 읽으면서, 이 책이 의도한 40일을 채워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루에 읽을 양도 많지 않지만, 게으름과 결별을 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과 함께 이 책이 주는 도전적인 메시지와 생각들을 나름대로 정리 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에서 기록해 두려고 합니다.

7일째의 제목은 The reason for everything. 번역하면, 모든것에 대한 이유? 정도가 될려나요?

이날의 주제는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 되었다 입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너무나 추상적으로 들립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 되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내가 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당장의 삶을 내려놓고, 선교사나 목사의 직업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알리는데 모든 시간을 쏟아부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삶이 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언가 구체적인 예시나 가이드라인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 책에서는 역시 그런 궁금증에 대해서 묘사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의 실천적인 방법은 정말로 수십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대체적으로 요약을 해보면 다섯가지의 형태가 있다고 하네요.

첫째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고 합니다. 경배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찬양하고, 노래하고, 기도하고, 교회에 가서 예배보면 경배가 되는 것일까요? 그런 구체적인 행동을 하고 안하고가 문제가 아니라, 사실 경배라는 것은 하나님을 enjoy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그의 목적데로 지으신 우리의 삶을 드리는데 있다고 합니다. 역시나 추상적입니다. 하지만, 분명하게 제가 알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경배한다는 것은 어떤 종교적인 의식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너무나 기쁜 마음으로 사랑하는 그 삶의 태도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마음에서 다니는 교회와 찬양과 기도는 얼마나 아름다울 것일까요?

둘째는 다른 믿는 사람들을 사랑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 말은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레위기 19:18, 누가복음 10:25-28, 마태복음 22:34-40, 마가복음 12:28-34)라는 성경의 말씀에 근거 한 것 같습니다. 아마도 첫째의 이유가 신명기 6:5에서 나온 것을 예수님이 가장 큰 계명에 대한 율법사와의 대화에서 인용하신 것에 근거하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교회에 있는 사람들과 믿는 사람들을 사랑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 같네요. 이런 사랑이 저에게는 아무래도 부족한 모습인 듯 싶습니다.

세째는 예수님과 같이 되어가면서 하나님의 영광에 다가갈 수 있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 두가지 이후에 실천적인 삶에 있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네째는 우리가 가진 것으로 타인을 섬길때 하나님의 영광에 다가 갈 수 있다고 하네요. 우리가 태어나고 가지게 된 것이 모든 것이 우연이 아닌, 하나님의 특별한 창조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자기 만족과 자기 행복만을 위해 쓰이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게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을 타인들과 나누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누는 것과 그 마음은 성경 전반적으로 많은 부분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보아서, 이는 반드시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일인 듯 싶습니다.

다섯째는 하나님을 타인에게 알림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에 다가갈 수 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이것은 전도를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위의 네가지 요소가 다 있다고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명확하게 하나님에 대해서 소개할 수 없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게 되는 것 같습니다.

위의 다섯가지 요소들은 아마도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모두 들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 추상적입니다. 이 추상적인 다섯가지 요소들을 어떻게 (하나님이 나를 나되게 만드신) 나에게 맞는, 그리고 나에게 독특하게 적용 할 수 있는 부분은 무엇이 있을까요? 그것이 아마도 내가 풀어야 할 숙제 인 듯 싶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숙제는 procrastinated 된다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

(이 글은 2010년 1월 중순즈음에 기록했던 글인데, 최근 잠시 시간이 되어 정리하여 올립니다.)

이 글은 샌디에고 한빛교회에서 한국의 사랑의 교회 전 목사님이신 옥한음 목사님께서 만드신 제자훈련교제를 가지고 제자훈련을 하는 중에 구원의 문제에 대해서 일반 성도의 수준으로 기독교에서 말하고 있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다는 것”의 주제에 대해서 기록하고자 합니다.

우선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다는 것의 주체에 대해서 확연하게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다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내”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말하고 있는 구원의 핵심은 그 주체가 반드시 “하나님”이 보내신 “성령”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데 있습니다.

즉, 그 어떤 개인의 행위로도 구원과 연관 지을 수 없습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소관이지 인간 스스로가 어떤 행위를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 구원의 주체는 하나님이라는 말이며, 더 나아가서는 예정론의 근거가 됩니다.

따라서, “너 예수 안믿으면 천국 못가” 라고 얘기하는 것은 잘못된 오해를 일으킬 수 있는 말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예수님을 의지적으로 절대로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게 되어야만 구원을 받고 천국에 가므로, 아주 틀린말은 아닐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마음을 여시고, 예수님께서 들어오시고 나서부터 시작입니다. 그 후에, 자신이 죄인 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인정하게 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은혜가 없으면, 자신이 무슨 죄인인지 하나님앞에서 어떤 존재인지 전혀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 “처음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은 결코 내가 믿고자 하는 열의는 0%, 즉, 하나도 없으며, 이 “믿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누구도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자랑 할 수 없습니다. 즉, 내가 누구 보다 더 나아서 받은게 아니기 때문이고, 내가 다른 사람보다 인격이 낫기 때문에 구원을 받은게 아니며, 내가 누구 보다 조금 더 머리가 좋아서도 아니며, 내가 누구 보다 조금이라도 착한점이 있기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이 “결단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믿음은 이 “처음믿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을 위한 “처음 믿음”은 나의 행위나, 나의 의지가 전혀 없지만, 구원 이후에 살아가는 삶에 있어서의 “믿음”은 나의 행위의 의지가 들어갑니다.

다시말해서, “믿음 생활 잘 하세요.”라고 하는 것은, 구원의 믿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 이후의 믿음생활에 대해서 잘 하라는 말입니다. 즉,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데로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는 나의 의지가 들어갑니다. 나의 수고가 필요합니다. 땀흘리는 노력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노력의 믿음에 따라서, 천국에서의 상급, 이 땅에서의 상급이 분명하게 주어집니다.

(신학적인 용어로는 “처음 믿음”을 “칭의”라고 하며, 구원이후의 믿음에 대해서는 “성화”의 과정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두번째 믿음에 대해서 많은 크리스챤들이 소흘히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경에 많은 부분 이 두 믿음에 대해서 수 없이 많이 강조하고 있지만, 어떤 크리스챤은 한쪽으로 치우친 것만 강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특별하게 사명을 받은 사역자라고 한다면 다르겠지만, 일반 성도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은 크리스챤의 축복된 삶을 그대로 방치하는 죄를 범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가 보지 않는 곳에서의 최소한의 신앙의 양심을 가지고 살아 가는 믿음의 생활이 우리에게는 필요한 듯 싶습니다. 비록 이름이 없이 사는 평신도라 할 지라도 말입니다. 이런 믿음의 생활을 잘 하다가 꼬꾸라지는 크리스챤들을 많이 봅니다. 특별히 사역자들에게 다가가는 그런 유혹에 그냥 넘어가는 것들을 종종 봅니다. 돈에 대해서, 그리고 성에 대해서, 권력에 대해서, 신앙의 양심과 기본으로 살다가 많은 부분에서 넘어지는 사역자도 봅니다. 그리고 그런 사역자들의 실패를 사탄의 공격이라고 어떤 기독교인은 얘기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사탄의 공격과 유혹인 것은 맞겠지만, 그것을 이길 수 있도록 늘 노력하고 하나님께 촛점을 두어야 하는 삶을 매일매일 주의깊게 살아가야 하는 연습이 부족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분들을 정죄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고 싶은 말은 우리가 매일 매일을 믿음의 정진을 위해 연습하고 살아야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강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누가 보지 않는 새벽에 교통신호를 무시한다던가, 영화나 드라마를 정당한 루트가 아니고 불법으로 카피를 한다던가, 한국의 직장생활에서 결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상사가 룸싸롱에 데려갈때, 비록 와이프가 보고 있는 상황은 아니지만, 일을 핑계로 가는 것을 인정한다던가의 등등이 있습니다.

저는 미국에 와서 한 백인 친구에게 받은 실천적 삶에 대한 귀한 교훈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백인은 미국인은 아니었고 캐나다인으로써 일 관계로 멕시코에 일본인 친구와 함께 출장을 간적이 있었습니다. 하루 일과를 끝내고, 숙소로 돌아가려던 중에, 일본인 친구 (그의 역할이 거의 영업과 비슷한 역할이었습니다.)가 멕시코로 왔으니 쉬는 김에 클럽 (멕시코에서의 클럽은 스트립쇼와 함께 잘못하면 성관계까지 갈 수 있는 곳입니다.)에 가자고 그 캐나다인과 저와 다른 미국인과 함께 꼬득였습니다. 보통 제가 알고 있는 한국사람의 특성은 출장이나 출장이 아니더라도 서울에서 룸싸롱등을 가는 것이 비지니스하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문화였습니다. 아마 일본의 문화도 비슷했던 모양입니다. 꼭 문화가 아니더라도, 남자들이라면, 그런 문화에 길들여져 있고, 한번쯤 눈감고 갈만한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크리스챤인 저는 보통은 그런 상황에서 드러내지 않고 (즉 분위기 깨지 않고), 그냥 그런 곳에 가기는 하지만, 여자들과 살을 섞지만 않고 내 자신을 지키다가 돌아오는 것이 최선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캐나다인은 달랐습니다. 자신의 손에 낀 반지를 그 일본인에게 똑똑히 보여 주며서, 나는 결혼 했다. 결혼의 신성한 서약이 있는데, 나는 그런 곳에 결코 갈 수 없고, 불편하다. 라고 얘기하면서 소위 말하는 분위기를 깨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 모임을 구성하려던 그 일본인만 혼자 가고 우리 나머지는 그냥 숙소로 돌아 왔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그 캐나다인이 기독교인인지 아닌지는 확인 할 수 없었지만, 크리스챤이라고 했던 나의 모습이 얼마나 부끄러운가, 그리고 그 친구가 준 교훈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배웠습니다.

자신에게 돌아 올 수 있는 불이익이나 손해를 계산하기에 앞서서, 바른 말을 하고, 정직한 삶의 실천이 사실은 현대의 그리스도인, 특별히 한국 크리스챤들에게 더욱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그것은 자신의 영적인 건강함 뿐 아니라, 공동체인 교회와 사회를 건강하게 하는 일이라고 분명히 믿습니다.

노아시대의 악함과 현시대의 악함

한빛 교회 제자훈련중에 목사님께서 노아시대의 악함에 대해서 잠깐 언급한 적이 있었습니다.

노아는 당대에 하나님께서 가장 선하고 가장 의로운 사람으로 뽑았었습니다. 세상의 악함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무척 선하고 의로운 사람으로 뽑았습니다. 그런데, 그 노아가 방주 이후의 행동을 보면, 그 수준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독주를 마시고 벌거벗어 누워있는 장면이 성경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가장 의롭다고 뽑힌 사람의 의로운 수준이 그 정도 입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세상 사람들의 수준을 알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의롭다고 한 사람이 독주를 마시고 뻗는 일을 하는 수준이라면, 나머지 세상 사람들의 악함은 정말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든 일일 것 입니다.

구약시대의 악함에 대해서, 바벨론 시대의 악함, 노아시대의 악함, 소돔과 고모라의 악함 등에 대해서 성경은 모든 것을 세세하게 기록하고 있지는 않지만, 몇가지 사실을 추정을 해보면, 그 시대의 악함은 현대의 우리가 사는 세상과는 너무나도 다르게 악한 세상일 것입니다.

소돔에 두 천사가 룻의 집에 거하려고 할때, 소돔 사람들은 그를 성적으로 범하려고 몰려 들었었습니다. 얼마나 그 상황이 악했으면, 룻은 자기 딸을 차라리 주고 죄를 범하지 않으려고 했을까요. 지금으로는 정말 상상이 가지 않지만, 그 시대의 그 악함에 대해서 잘 반영해 줍니다. 물론 그 천사들이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여 찾지 못하게 하고, 룻의 가정은 이 일을 계기로 소돔과 고모라를 떠나게 되지요.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렇다면, 정말 의로운 세상이 되었을까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는 분하고 화가 나는 일이 생겼을때, 나 자신이 정말 악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을 저는 보게 됩니다. 아마 하나님을 믿고, 사회적인 책임이나 그 모든 이성이 그 화내고 분내는 것 이후에 누그러진다 하더라도, 나는 내 자신에게 악함과 죄성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쉬운 시대에서는 그것이 나타났을 것이고, 그것이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도록 컨트롤 되는 사회라 할지라도, 때때로 사람들이 감정을 이기지 못해서 죄를 범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래서 죄성이 항상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이 피할수 없는 죄성에 대해서, 이 죄로 인해서 파멸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을 위해 자신의 핏값으로 대신 갚아주신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으며, 하나님께 고개 숙이며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분의 은혜가 그냥 너무 큽니다. 너무 크기에, 내게 아무리 큰 잘못을 한 사람이라도 나는 용서할 수 있는 기회와 용서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질수 있는 것 같습니다.

왜 하나님은 자연재해를 허락하실까?

얼마전에 Haiti에서 진도 7.0의 강도의 지진이 일어나 상상도 못할 많은 사람들이 어린아이를 포함하여 죽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하며, 도움의 손길을 주고 있었습니다.

항간의 어떤 사람들은 카트리나, 쓰나미, 아이티의 지진등을 놓고, 왜 하나님께서는 죄가 없는 그런 사람들이 그렇게 죽어가야 했던 것인가 하면서 분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 역시 그런 질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기도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허락하셨을까? 저 역시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그 질문을 분석을 해보면, 사실은 올바른 질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 질문은 죽음보다 하나님을 먼저하고 있고, 하나님 보다 위에 놓고 있는 가정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의 죽음은 비극이며, 너무 마음이 찢어지는 아픔입니다. 그러나 그 죽음의 사건보다 하나님이 위에 있을 수 없으며, 비록 이해가 가지는 않지만, 하나님을 향해 삿대질 하는 도덕적 기준보다 하나님이 아래에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질문을 하는 사람의 마음 속에는 이미 하나님을 적대할 수 있는 마음에서 출발했기에, 다시금 사람들의 마음은 죄성이 있다는 증거밖에 되지는 않습니다.

인생에 있어서도 많은 일들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 일들이 일어났을때,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하나님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성실하게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아이러니컬 한 것은, 집에서 피자를 먹으면서 하나님에 대해서 어쩌구 저쩌구 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정작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아이티 현장에서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 함께 구조에 발벗고 나서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어려움의 현장에는 기독교 선교사들이 함께 하고 있고, 기독교 봉사단체들이 앞장서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어려움에 처한 이웃, Haiti에 하나님의 긍휼이 임하셔서, 복구와 구제사업들이 잘 이루어져서 더 큰 피해가 없기를 소망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가수 장혜리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께요”

출처: GodPeople.com의 News (2008년 4월 26일, 10시 28분)

장혜리씨의 노래,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께요“를 듣다가, 갑자기 그 분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 졌습니다. 찾아보니, 의외로 크리스챤으로 CCM 가수로 지내고 있었습니다. 발견은 2008년에 기록된 GodPeople.com의 News에 있었습니다. 여기에 그 내용의 일부를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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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 년대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께요’ 라는 곡으로 인기를 누렸던 가수 장혜리가 CBS TV 찬양 프로그램 <워십콘서트 치유> ‘찬양으로 드리는 고백’에 출연, CCM가수가 되기까지 자신의 삶과 그 고백이 묻어나는 찬양을 시청자들과 함께 나눈다.

은퇴 후, 깊은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에 빠져

1986년 ‘오늘밤에 만나요’로 데뷔한 장혜리는 빼어난 외모와 시원한 음색, 뛰어난 가창력으로 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그는 무대공포증으로 가요계 생활을 힘들어했고, 결혼 후 은퇴를 하면서 깊은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에 빠져 절망 속에서 살았다.

“결혼 후 우울증이 심해져 불면증까지 있었다. 겨우 뒤척이다 새벽에 잠이 들면, 새벽기도를 가려고 준비하는 남편 때문에 잠이 깨곤 했는데, 그 때는 화가 나는 정도가 아니라, 마음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러면 냉장고에 있는 술을 다 마시고, 새벽기도에 갔다 들어오는 남편을 괴롭히곤 했다.”

“그 당시에는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서 귀중하다거나 소중한 느낌을 받지 못했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투신을 하겠다고 서서 ‘하나님 나 지금 죽으려고 하는데, 나 여기서 이렇게 죽어요. 내 삶이 여기서 끝나요’라고 말을 하는데, 그 순간 눈물을 흐르면서 통곡이 나와 주저앉고 말았다.”

인생의 벼랑 끝에서 장혜리를 다시 일으킨 힘은 바로 신앙이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라는 말씀을 주시고, 사랑을 주셨다.

“그 말씀과 사랑으로 존재감이 회복되고 나니까 그동안 죽으려고 생각했던 시간이 너무 안타깝고, 더욱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씀과 찬양을 통해 병든 몸과 마음 회복돼

그 후 수지 지구촌 교회에 출석, 본격적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한 장혜리는 말씀과 찬양을 통해 병든 몸과 마음이 회복되기 시작했고, 주님을 향한 마음을 담아 지난해에는 <장혜리 가스펠 앨범>을 출시하며 찬양사역자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장혜리
“당시에는 성대가 막힌 상태였고, 몸과 마음이 지쳐서 노래를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녹음실에만 들어가면 노래가 나왔다. 이번 음반은 하나님의 은혜로 만들어진 것 같다.”

그렇게 하나님과의 뜨거운 첫사랑을 경험하고, 가스펠 음반을 발매한 장혜리는 요즘 재소자와 장애우를 비롯해,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을 찾아다니며 간증과 찬양을 함께 나누고 있다.

1980년대 히트곡 ‘토요일은 밤이 좋아’, ‘사랑이 저만치 가네’의 가수 김종찬 전도사가 진행하는 <워십콘서트 치유> ‘찬양으로 드리는 고백-가수 장혜리 편’에서는 그의 음반에도 수록된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나 무엇과도 주님을’ 등의 찬양도 함께 나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