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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이 시편 57편을 쓸 당시는…

유기성 목사님의 설교중에 다윗에 대한 예화를 들으면서 또한 은혜를 받습니다.

다윗은 블레셋의 골리앗을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사무엘상 17:45)” 라고 하면서 블레셋의 골리앗을 물리쳤던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 사울왕의 시기를 받아 사울왕이 죽이려고 다윗을 해하려고 합니다. 아내도 빼앗기고, 도망가서 도움을 받은 제사장이 사울왕에 의해 죽음을 당하게 되자, 아무도 다윗을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에서 도움을 받지 못하고, 하다하다 못해, 적국인 블레셋, 골리앗을 죽인 그 블레셋으로 도망을 갑니다.

도망간 블레셋에서도 다윗을 알아보고 죽이려고 하자, 다윗은 미친척을 합니다. 침을 질질 흘리고 벽을 긁고 해서, 블레셋 사람이 내쫓아서, 그래서 겨우 목숨을 건져 빠져나옵니다. 그래서 다윗은 아무도 없는 광야로 갑니다. 짐승들만 있는 광야로 쫓겨가, 굴에 숨어, 거기서 다윗은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시편 57편을 썼다 합니다.

1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2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3 그가 하늘에서 보내사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나를 구원하실지라 (셀라) 하나님이 그의 인자와 진리를 보내시리로다
4 내 영혼이 사자들 가운데에서 살며 내가 불사르는 자들 중에 누웠으니 곧 사람의 아들들 중에라 그들의 이는 창과 화살이요 그들의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
5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6 그들이 내 걸음을 막으려고 그물을 준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 그들이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자기들이 그 중에 빠졌도다 (셀라)
7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8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9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10 무릇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
11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어떻게 다윗은 그런 상황속에서 감사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을까요.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를 버리고, 자기 조국도 버리고, 다 빼앗기고, 심지어는 미친척을 하여 적국에서 겨우 목숨을 건져 도망나온 그 신세에, 그는 어떻게 이런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었을까요?

믿음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자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 11:6)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결코 세상의 성공과는 전혀 별개의 것이며, 반대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십자가의 길을 가셨고, 십자가는 결코 세상입장에서는 성공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사람들은 내려와보라고 하면서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존심이나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알량한 사탄의 공략속에서 그는 묵묵히 하나님께 순종만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후에도 모든 제자들과 사도들은 순교를 각오하였고, 실제로 많은 분들이 순교하셨습니다. 세상의 성공과는 너무나 판이하게 다릅니다.

예전에는 마음 한켠에 두려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 너무 잘 믿으면, 교회에 너무 빠지면 그렇게 고생하는거 아냐?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제 아닙니다. 고생이나 고난이 두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며, 그 분을 믿고 따르기만 한다면, 환경은 저에게 어떤 흔들림도 주지 않을 것입니다.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 한분이면 정말 “충분”합니다. 그 분 한분이면, 충분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두가지 관점

하나님에 대해서 분석하고, 어떤 현상이나 Event가 발생하였을때, 궁금해하고, Understanding을 먼저하려고 하고, 왜 그랬을까, 무슨 이유일까, 어떤 의도가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앞서는 마음이 보통 사람들이 하나님을 생각할때 바라보는 한가지 관점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 분의 뜻을 이미 알고, 그것에 실천하면서, 죽기까지 순종하면서 십자가의 길까지 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역시 전자인 듯 싶습니다. 아마도 하나님을 더 깊게 묵상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더 깊게 사랑하는 마음이 앞서기 보다, 이성이 먼저 앞서고, 분석하고, Understanding을 하려는 마음이 더 앞서는 모양입니다.

나의 죄와 나의 허물을 먼저 보고 하나님께서 행하여 보여주신 수 많은 것들에 대한 감사와 찬양과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기보다는 이성적인 Understanding에 의해 모든것이 좌지우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이 나에게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 내 명철을 의지 하지 않고 전적으로 주님을 신뢰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소서.

크리스챤으로 바라보는 타종교

최근에 한국에 봉은사사건이 있었고, 저는 이 사건의 잘못은 과격한 행동을 한 기독교계 청년들에게 있다라는 생각으로 “봉은사 신도들과 명진 스님, 죄송합니다” 라는 링크를 추천하고 동의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좀더 구체적으로 제가 선을 그어야 할 필요는 있어 따로 이 블로그에 적어 둡니다.

저는 크리스챤으로써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며, 그리고 절대적으로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믿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타 종교에는 구원이 없다고 믿고 있으며, 그것이 아주 기초적인 제 신앙의 원리이며 기본입니다. 흔들릴 수 없으며, 그 원리를 공격하고 왜곡하는 모든 것은 이단 혹은 다른 종교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불교나 이슬람이나 다른 종교계에서의 훌륭한 점들, 본 받을 만한 교훈들을 무시하거나 배격하지 않습니다. 저는 실제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등의 말을 했던 성철 스님은 존경할 만한, 그리고 훌륭한 것임을 저는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제가 가진 기독교의 기본 신앙이나, 제가 가진 기독교적 가치관을 흔들거나 하는 일은 전혀 없습니다.

물론, 성경의 진리가 참 진리이며, 예수 그리스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다원주의를 옹호한다던가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는 다는 식으로 타 종교를 접근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잠시 나그네 인생을 살고 있는 이 세상에, 다른 철학자나 다른 종교, 혹은 타 종교인들의 훌륭한 인격과 좋은 이야기들, 혹은 좋은 교훈들을 내가 배우고 깨닫고 더 성숙하게 하는 것을 굳이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배격해야 할 이유는 조금도 없습니다.

만일, 진정 그 기독교계 청년들이 불교인을 너무 사랑하여, 혹은 우상숭배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면, 그들은 먼저 진정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되었어야 할 것입니다. 만일, 분노하여 절 주변을 돌면서, 혹은 절 안에 들어가서 기도하는 행위를 했다면, 그것은 분명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기도하는 티를 사람들에게 내보이는 위선과 같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향해, 분노하고 그 분이 가진 능력으로 그 당시의 조롱하는 악한 사람들을 모두 진멸하였다면, 과연 하나님의 사랑과 그 분의 구원의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지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 기독교계의 청년들은 아마 기독교의 “기”도 모르고 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그것을 제대로 알기가 그렇게 쉽지 않음을 또한 저는 이해합니다.)

또한 우상숭배라는 것은 하나님을 알고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적용이 되는 것이지, 믿지 않는 사람에게 강요하여 적대감을 가지는 것은 결코 옳은 생각이 아닐 뿐더러, 옳은 행동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것을 과연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때 과연 좋아하셨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면 (물론, 이 가정도 무척 힘든 가정입니다.),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정치나 정권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의 제자들과 같은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령의 오순절 강림이후, 예수님과 같이 살았던 사도들과 같은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수 많은 “그리스도인”들 처럼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 23일째: How We Grow

며칠을 조금 쉬었습니다. 몸도 조금 아팠고, 조금 책을 읽는데 게을렀던 듯 싶습니다.

마침 책을 읽는데, 오늘의 주제는 Growing 이네요. 그리고 Growing을 설명하면서, 실천하는 결단과 실천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장으로 가는 첫 발걸음은 “결심” 입니다. 본인이 스스로 성장하겠다고, 본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겠다고 “결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 자신의 결심이 없이는 무언가 하기란 참 힘이 들겠지요.

영적 성장에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있고, 내가 해야 하는 일이 있다고 합니다. 아직 어떤 것이 하나님의 일이고, 어떤 것이 나의 일인지 명확하게 Define 되지는 않았습니다. 어렴풋이 이런것이 하나님께서 하시고, 이런 것이 내가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만, 앞으로 이 부분에 대해서 책에서 설명할 것이라고 하기때문에 우선은 그런 역할이 있다는 것만 알고 넘어 가기로 합니다.

또하나 영적 성장에 중요한 것은 “생각”입니다. 모든 행동은 “믿음”으로 동기유발이 되며, 모든 행동은 “가치/태도(Attitude)”로 인해 행해진다고 합니다.

그리고 결국 크리스챤의 성숙에서 필수 불가결한 것은 “남”을 “나”보다 먼저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분명히 그렇게 살아 간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혹은 세월을 따라 나이를 먹어가고, 교회에 오래다니고, 혹은 사역이나 직분을 맡아서 그렇게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정작 “남”을 “나”보다 먼저 생각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보이신 그 모범을 따라가지 못하는 모습들이 많이 있는 듯 싶습니다. 저 역시도 그렇구요. 그러나 주변에 보면,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멋진 그리스도인들을 보면서, 마음에 감동을 받기도 합니다. 그리고 기도하기로는 그 분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더 임하였으면 하는 생각도 하게 되기도 하는군요. 실제로도 그럴것이,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에 복있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인 듯 싶습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 22일째: Created to Become Like Christ

큰 주제를 놓고 보았을때, 오늘부터 28일째까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에 촛점을 두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처음에 천지를 창조하실때 인간을 가장 하나님과 비슷한 이미지로 만드셨는데, 그 이미지에 예수 그리스도가 투영이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실상 예수님 만이 이 세상에 눈으로 볼 수 있는 인간중에 하나님과 같은 분은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과 같이 될 수는 없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이미지를 가질 수는 있다고 합니다. 아마도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모두 하나님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로 인해 그것이 왜곡되고 변형되고 일그러져 있고 그래서 결국 죄가 낳은 파괴와 분열과 싸움과 적대감이 만연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읽은 부분 중에 이 말이 다가 오네요.

“Why is this happening to me? Why am I having such a difficult time?” One answer is that life is supposed to be difficult! It’s what enables us to grow. Remember, earth is not heaven

크리스챤에게 일어나는 알 수 없는 고통과 힘겨움들. 그 질문속에서 왜 하나님 이라는 질문을 종종 할때가 있습니다. 저 역시 이 질문 많이 했습니다. 물론 평소에는 “성숙”하기 위해 필요한 고통에 대해서 잘 이해도 합니다. 대학생때 보았던 C.S. Lewis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Shadowland라는 영화속에서 등장하는 멋진 대사중의 하나는 “기도는 하나님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변화 시키는 것입니다.” 라는 대사였습니다. 동감했습니다. 그런데, 영화에서도 나오지만, 정작 C.S.Lewis의 연인이 암으로 죽어가자 그 역시 외치는 비명은 “왜 하나님?” 이었습니다. “성숙”이라는 것을 잘 알기는 하지만, 고통이 올때 그 질문을 시작으로 하나님과 대화를 열어가기 시작하는 시발점이 아닌가 싶네요.

갑자기 빌게이츠가 고등학교에서 한 연설중에 한 대화가 떠오르네요. “Life is not fair – get used to it.” :)

그러나 정말 확실한 것은 그 고통스러운 시기를 지나고 나면, “정말로” “성숙” 해지는 내 모습을 본다는 것입니다. 조금씩 조금씩 천천히 성장하는 내 모습을 보곤 또 놀래기도 하고, 아직도 옛모습을 버리지 못한 모습도 같이 공존하는 그런 것이 반복되는 것 같습니다.

또 하나 오늘 짚고 넘어갈 것은 성령께서 우리의 약함을 도우시지만, 그 약함을 도우신다는 의미가 우리가 무엇을 하기를 선택하는 것을 도우시는 것이 아니라, 선택을 우리가 하는 것에 어떻게 우리가 행해야 할 것인가를 도우신다는 얘기였습니다. 예를 들어, 이 직업을 가질까요, 말까요, 를 고민하는 것에 성령께서 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무슨 직업을 갖던지, 그 직업을 통해서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도우신다는 말씀인 듯 싶습니다.

날마다 그런 즐거움(?)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또 겸손하게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또 하루를 살아야 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 21일째: Protecting Your Church

Unity와 Uniformity의 다름을 강조하면서 오늘의 주제는 교회 공동체를 위해 개인이 알아두어야 할 것들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약간 혼동이 오고 있습니다. 지난번까지는 정직을 위해서 분명한 태도를 보이라고 하더니, 오늘은 공동체를 위해 본인의 희생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두가지의 Balance 를 맞추는게 쉽지는 않은일 같습니다. 좀 더 책을 읽으면서 고민해 봐야겠네요.

목적이 이끄는 삶: 20일째: Restoring Broken Fellowship

오늘의 주된 주제는 깨어진 관계를 어떻게 회복하느냐 입니다.

평화는 미스코리아나 미스 유니버시티에 출연하시는 분들만 원하는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정말로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Peacemaker가 되는 것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닙니다. Peace는 누구나 사랑하지만, Peacemaker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땀과 노력과 불편한 관계를 극복해야 하고, 솔직한 얘기와 함께 관계를 깨지 않아야 하는 멋진 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정말 쉽지 않습니다. 문제가 있는데, 그 문제에 대해서 집중하다보면, 조금 격한 표현과 말이 나올 수도 있고, 해결이 되어서 서로 좋은 관계가 형성되기 보다는 그 관계가 깨지는 경우도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것을 마냥 숨기거나 계속 미루기만 할 수는 없습니다. 즉시 행동하되, 우선 오늘 Chapter에서 Recommend 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 먼저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겸손과 부드러운 말로 문제에 대한 제기를 하면서, 그 문제의 해결이 나에게 촛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유익이 될 것에 대해서 촛점을 두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문제 제기가 있어야 하며, 어물쩡 거려서도 안됩니다.

아, 정말 어렵습니다. 두가지가 상충되는 것 같습니다. 평화와 문제 해결은 공동체에서 정말 필요합니다. 다시 어제 Speech of Freedom과 Bad Words의 토론이 생각이 납니다. 결론은 Speach of Freedom입니다. 결론은 문제에 대한 문제제시와 해결책이 공동체에 필요할때 반드시 이행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이행에 있어, 절대적인 성령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먼저 기도하는 것이 필수 있듯 싶구요.

목적이 이끄는 삶: 19일째: Cultivating Community

미국 초등학교에서 흔히 있는 토론 주제중의 하나는 “Freedom of Speech” 와 “Bad Words”의 경중 (Weight)를 따지는 토론이 있다고 합니다. 두가지는 상호 충돌할때가 있는데, 그래도 어떤 것이 더 소중한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답은 “Freedom of Speech” 입니다.

오늘 공동체를 Cultivating 하기 위해 필요한 몇가지 요소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요즘 Community에 관련된 이야기중에서 역시 반복되게 강조하고 있는 것은 Honesty 입니다. 만일 공동체에서 어긋나거나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형제/자매가 있다면, “사랑”과 “겸손”을 가지고 그 형제/자매에게 다가가서 솔직하게 얘기해야 합니다. “사랑”과 “겸손”을 가지고 얘기한다 하더라도, 그 형제/자매가 싫어 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은 현대의 교회에 또하나의 문제점 중의 하나는 그렇게 솔직하게 얘기하는 것을 두려워 한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그렇지요. 상대가 나를 싫어 할 수 있고, 관계가 깨질 것이 두려워서, “False sense of Peace”에 대한 미신으로 얘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또한 무척 싫어하시는 것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물론, 무례하게 얘기하거나 정죄하는 투로 얘기하는 것은 옳지는 않겠지요. 성경은 적당한 때와 적당한 방법이 항상 존재한다고 합니다. 그 때에 용기를 내어 솔직한 고백과 솔직한 이야기들이 필요한 듯 싶습니다. 그리고 그 솔직함이 그 공동체를 더 가깝게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외에 오늘 공동체를 발전시키는 요소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는 것은 겸손, 예의바름, 비밀유지, 빈도 등이 있습니다. 비밀유지는 공동체에서 있는 “죄”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 다거나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서 서로 기도제목을 나누고 서로의 사생활에 대해서 얘기한 것을 다른 어디서도 얘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Gossip이 될 수 있고, 하나님은 Gossip을 아주 싫어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 공동체를 깨뜨릴 수 있습니다.

종합하면, 이상적인 공동체는, 신실성 (Authenticity), 상호성 (Mutuality), Sympathy, Mercy, Honesty, Humility, Courtesy, Confidentiality, 그리고 Frequency 가 있을 수 있습니다. (중간에 한글로 번역하기가 제 실력으로는 부족해서 그냥 원문으로 썼습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 18일째: Experiencing Life Together

크리스찬의 Fellowship에 대해서 오늘 설명하고 있네요. Christian Fellowship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를 요약하면, Authenticity (진실성/진정성), Mutuality (상호성), Sympathy (동질성), Mercy (은혜/자비)가 있다고 합니다.

흔히, Fellowship 이라고 하면, 그저 교회에서 모여서 밥을 먹거나 Refreshment 등을 먹으면서 서로 간단하게 얘기하는 정도로만 쓰여지는 것이 사실입니다만, 오늘 이 부분에서 Fellowship에 대해서 그런 것이 아님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Fellowship을 하면서, 마치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이행하고 사는 듯, 혹은 자신의 삶에는 그다지 큰 문제가 없는 듯,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마스크를 쓰고 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Fellowship은 Authenticity가 있다고 합니다. 서로의 상처에 대해서 나누고, 서로의 감정을 드러내기도 하고, 실패에 대해서 고백하고, 의심을 숨기지 않으며, 공포와 약함을 인정하고 도움을 구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해주는 모습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오늘날의 Fellowship에서는 정직과 겸손대신에 있는 척을 하고, 역할놀이를 하며, 정치적이고, 표면적인 친절함은 있지만 얕은 대화정도가 되고 있다는 것이 문제라고 합니다. 이것은 죽은 Fellowship 이라고 말하네요.

저도 그런 Authenticity가 있는 Fellowship을 가지고 싶습니다. 대학생때에 가졌었던 그 Fellowship을 사회에 나와서는 좀처럼 찾기가 힘드네요.

오늘 있었던 또 다른 교훈중의 하나는 은혜와 자비에 대해서 입니다. 이 은혜와 자비를 베풀기가 꺼려지는 큰 이유중의 하나는 용서와 신뢰를 구별하지 못하는데 있다고 합니다. 용서는 과거를 그냥 흘려 보내는 것이고, 신뢰는 반드시 미래의 행동과 같이 연결이 되어 있다고 합니다. 용서는 반드시 그 즉시 해야 하지만, 신뢰는 회복하는데 시간이 많이 필요합니다. 만일 누군가 계속해서 상처를 주고 있다면, 용서는 주님의 이름으로 즉시 해야 합니다만, 신뢰를 바로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 상처를 주는 사람이 계속해서 상처를 주도록 해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상처를 주는 사람은 반드시 그들이 시간을 통해서 변화 되었다는 것을 증명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 Fellowship에 대해서 계속해서 다음 Chapter에서 다룬다고 하니, 기대가 되네요.

목적이 이끄는 삶: 17일째: A Place to Belong

오늘은 교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랑을 하고, Relationship이 있다면, 그 실천의 대상은 지역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도 얘기합니다. 교회 봉사가 너무 많아. 교회에서 뭐가 그렇게 하는게 많은지. 주말에 가족들이랑 어디 놀러가고 싶어도 못가겠어. 주중에도 왜 그리 모임이 많은거야? 꼭 교회에 봉사해야해? 그냥 일요일에 교회가서 좋은 말씀 듣고, 그냥 가족들이랑 나머지 시간에 놀고 하면 뭐가 잘못이야?

저도 너무 많은 시간을 교회에 쏟는 것에 대해서는 사실 부정적인 입장이긴 합니다. 그러나, 교회에 아무 봉사를 하지 않고 Dry하게 Attending만 하는 것도 옳지 않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 이유는 오늘 책에서 성경에 근거하여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교회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회 구성원들은 그 몸을 지탱하고 있고, 어느 몸하나 잘못되면, 그 몸 전체가 아픈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몸을 잘 지탱하려면, 서로서로가 commit 하여야 합니다.

교회가 완벽하거나 이상적인 교회는 세상에 눈 씻고 찾을 수 없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아주 성실하고, 착하고, 선하고, 예의 바르고, 사람들을 잘 챙겨주고, 친절하고, 그런 것으로 착각하시는 분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닙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는 “도”를 쫓아가려고 부지런히 삶에서 연습하고 다가가는 사람들을 Christian 이라고 부릅니다만, 꼭 그런 분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직책이나 그런것과도 관련이 없습니다. 우리는 타락한 죄인일 뿐입니다. 그러나 타락한 죄를 가진 우리를 위해 스스로의 목숨을 commit 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본다면, 서로 부족하고 타락된 죄성을 가진 우리 서로서로가 “사랑” 으로 용서하고 가르치고 알려주고 등등으로 서로를 세워나가면서 서로에게 commit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참석만하는 Attender와 교회의 몸의 지체인 Member 와의 차이는 그 commitment에 달려 있다고 합니다.

Sadly, many Christians use the church but don’t love it

어떤 사람은 아이의 교육을 위해, 혹은 아이들때문에, 어떤 사람은 배우자 때문에, 어떤 사람은 사업을 위해서 등등으로 교회를 찾기도 합니다. 그것은 교회를 “이용”을 할 수는 있지만,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주님, 교회를 이용하려하지 말고, 교회를 사랑하게 하옵소서. 주의 영적 지체인 형제/자매들을 잘 섬기고 Contribute 할 수 있도록 늘 약한 저를 성령으로 강하게 하소서.

목적이 이끄는 삶: 16일째: What Matters Most

Life minus love equals zero.

오늘 읽은 부분에서는 위의 부분이 다가 왔네요. 인생-사랑=0. :) 즉, 인생=사랑 이라는 얘기지요. 하나님이 주신 모든 인생에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0라는 얘기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도 바울이 썼습니다. 아무리 능력이 있고, 아무리 큰 믿음으로 산을 두세개 옮기고, 아무리 큰 사역을 한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주님 앞에서 꽝이라는 얘기지요. :)

이 사랑이 참 말은 쉽고, 친근하고, 무엇인지는 잘 알겠는데, 실천하기는 쉽지가 않네요. 정말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책은 정말 크게 도전하네요. 가장 소중한 일이기 때문에, 그 무엇보다 우선시해야 한다고 합니다.

머리로 알고 있는 사랑이 가슴으로 내려오는데, 얼마나 시간이 오래 걸릴까요? 주여, 사랑하게 하옵소서. 내게 보여주시고 부어주시는 그 사랑으로 형제/자매들을 사랑하게 하옵소서. 성령께서 약한 저를 도우소서.

(펌) 여러분 가운데 ‘나의 실패가, 나의 하는 일의 실패가 오히려 사람들을 예수 믿지 못하게 하는 게 아닐까요?’ 그렇게 생각하는 분 계십니까?

여러분 가운데
‘나의 실패가, 나의 하는 일의 실패가 오히려
사람들을 예수 믿지 못하게 하는 게 아닐까요?’
그렇게 생각하는 분 계십니까?

“너 처럼 될까봐 안 믿겠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은요, 예수님에게도 그런 말을 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그 분에게도 그 말을 했습니다.
“너 같이 될까봐..!”
“네가 진짜 그리스도냐!”
“네가 진짜 그리스도인이냐!”
“너 같이 될까봐 난 안 믿겠다!”

그런 사람은 예수님에게도 그와 같은 말을 합니다.
그것 때문에 안되는 게 아니에요
그것 때문에 안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임재, 이미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그 불이 이미 우리 가운데 붙었습니다.
우리가 굴러다니는 떨기나무 같을지라도
우리를 태우시지 않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 불!
그 분이 이루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가진 것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잘하는 그 일로 하는 게 아니고,
우리 안에 계시는 그 성령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헌신하기로 결정하면,
그 때 하나님의 역사는 시작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헌신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의 영광을 위해 우리 자신을 온전히 던지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도 우리가 우리를 위해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 죽고 다시 사신
그 분을 위해서 살고 있지 않고 있기 때문에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삶을 시작하면
반드시 우리가 주의 영광을 볼 것입니다.
어둠의 영이 무너지고 주의 영광이 모든 세계에
가득 채워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할 수 있는 것, 할 줄 아는 것 아무 것도 없는 떨기나무와 같은,
마른 나뭇가지와 같은 제가 여기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주님 임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주를 섬기겠습니다.
세상을 위해 살지 않게 하소서 !
세상의 영광을 위해 삶을 버릴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

– 임 이스마엘 선교사 메세지 중 –

목적이 이끄는 삶: 15일째: Formed for God’s Family

오늘의 주제는 주안의 한가족인 듯 싶습니다.

그런데, 그게 그냥 그렇게 생각한 주안의 한가족보다 더 강렬하게 이 책은 이야기 하고 있는 것 같네요. 피를 섞은 가족보다 영적인 가족이 훨씬 더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피를 섞은 가족은 지상에서 잠깐이지만, 영적인 가족은 영원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영적인 가족이라하면, 크리스챤들과의 코이노니아를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제가 싱글일때는 학교 CCC 에서 사랑방생활을 하면서 친구들/순장님/간사님들과 뒹굴면서 지냈기때문에 그때는 그 친구들과 그 인연들이 소중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싱글을 넘어서 더블이 되고 트리플이 되면서 각자의 인생을 살기 시작하고 헤어지고 사회에 나오면서 많이 떨어지게 되면서 뜸해져서 그런지, 아니면, 어떤 이유가 되서든지, 현재의 가족보다 영적인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는 형제 자매들을 내가 과연 더 소중하게 생각할 수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입니다. 어쩌면, 과거 교회사람들이나 사람들에 대해서 좋지 않은 모습도 보았었던 영향이 있을 수 있고, 사람이 사람을 신뢰한다는 것이 얼마나 조심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것도 알게 되는 나이가 되었을 즈음에 영적인 형제/자매를 가족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하라는 오늘의 도전말씀은 지금으로는 참 받아들이기가 힘드네요.

물론, Ideal 하게는 저도 동의하는 statement입니다. 그러나 실천하기에는 아직은 제가 예수님의 수준까지 가기는 턱없이 부족함을 여전히 느끼고 삽니다.

이 문제는 좀 더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만, 이 주제가 큰 카테고리안에 있기때문에 계속 나올 주제 같네요.